백성훈
▲백성훈 목사. ⓒ이름없는교회
시편 78편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생에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78편은 이스라엘이 분열된 후에 쓰인 시로써, 북이스라엘의 변질과 타락 앞에 다시 회개하여 돌이킬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를 대비시키며, 죄악을 강조함과 동시에 돌이킬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긍휼이 계속 반복되는데, 이 반복이 곧 강조를 위한 반복이고 무려 72절에 해당하는 장문의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1절에서 8절까지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임을 호소합니다. 그 중 7절과 8절에서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7-8절)”.

하나님 말씀은 성경을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기억이 우리의 기억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 당장의 삶에 기준이 되고 모델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어떤 기준을 따르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결론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결정과 선택의 기준은 바로 성경이어야 합니다. 너무 감사한 사실은, 성경에는 신학과 교리적인 신앙의 원리만 나오지 않고,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삶에서 경험하는 많은 경우의 수를 배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히 그 경우의 수들에 대해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우리 믿는 자들이 성경을 기준으로 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불순종이라고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이 말씀을 가르칠 것을 요청합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가 과거의 역사를 아직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듯 말입니다.

특히 일제 시대와 6.25 전쟁의 역사는 요즘 세대들이 잘 모르는 경우들도 있다는데, 이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의 역사도 그 중요함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과함이 없는데, 하나님이 일하신 과거의 역사는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이 이 역사로 성경을 기록하시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 기준을 삼으라고 명령하셨으니, 그 중요함의 강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9절부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긍휼이 계속 반복적으로 대비가 됩니다. 10절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과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12절부터는 반대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탈출시키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쫒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리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지켜 주셨는데, 이 두 기둥은 이스라엘을 따라다니며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가야 할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또 물이 필요할 때는 반석을 쪼개어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이 장면을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다(16절)”고 표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다시 이스라엘의 범죄를 말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는데,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긍휼을 허락하시어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이 바로 불순종의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의 근원을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22절)”.

이런 이야기가 17절부터 31절까지 또 반복됩니다. 그만큼 우리의 범죄와 하나님의 긍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감사한지 예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일이 그저 즐겁고 행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구원의 감격은 사라지고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힘든 노동이 되어 의무감과 억지로 하게 됩니다.

성경은 현실을 감안하지 못한 비현실적 이론이 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는 성경의 이야기로 끝이 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32절부터 39절까지는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 앞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그 감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민수기 14장의 가나안 정탐꾼 사건이 언급되는데, 그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드러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무려 38년을 더 방황하게 되어 총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죄악보다 크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원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그 분의 크신 사랑과 긍휼을 구체적으로 알게 될 때, 내가 얼마나 그분을 모르고 오해하고 배신하며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감격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영혼을 만지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리게 하시는데, 이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되는데, 이 놀라운 일들 가운데 우리가 다시 말씀을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결단이 서게 됩니다. 38절과 39절에는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용서하실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절)”.

여기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 마음 때문에 우리를 다시 용서하신 겁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가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을 때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잠깐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은 영원합니다.

그런 우리의 인생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저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이 긍휼이 너무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그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 감격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면, 당장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감격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슬픔조차 이기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40절부터 55절까지는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비록 40년간 광야에서 방황을 했지만, 결국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하나님 앞에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범죄만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크게 진노 하셨는데, 41절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진노함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노엽게’라는 표현은 슬프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하나님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슬픔을 감당하시면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위엄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인생을 맡기기에 충분하며 안전합니다. 이제 56절부터 이야기는 다시 이어져,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로 연결됩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되고, 하나님의 긍휼도 계속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악을 보시며 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59-62절)”.

여기서 ‘크게 미워하사’라는 말은 곧 ‘버리다’의 의미입니다. 그 미움의 강도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다시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미움의 시간에는 블레셋 등 많은 이방의 민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하셨습니다(62절). 이 과정에서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처녀들은 혼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노래를 부르며 슬픔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65절부터 72절까지는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시고 하나의 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신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반복된 죄악을 보면서 결코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선포하며 시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0-72절)”.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 이스라엘과 시름을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며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이 외침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에 응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응답하지 않으시는데 기도하라고 했겠습니까. 응답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당장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죄악을 보며 낙심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스라엘을 이토록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며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