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백성훈 목사가 예배당에 처음 출석한 유아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시편 82편 1



하나님은 정직과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그 사랑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정직과 정의입니다.

시편 82편에서는 ‘재판하시느니라’, ‘공의를 베풀지며’와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공의는 형벌 없는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형벌을 내리고 그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말 한 마디로 용서하지 않으시고, 굳이 성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를 형벌도 없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구약 시대의 경우에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단 위에 흠 없는 어린 양을 올리고 사람의 죄를 대신 품고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제사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흠 없는 어린 양처럼 죄 없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품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어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자신을 죽이기까지 하시며 실천하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유 때문에 공의를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속성을 본받아 공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람의 관계에서 공의가 행하여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어디일까요? 바로 법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 시대부터 법정에서 일어난 재판에 대하여 공의로운 판결이 내려지기를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재판에 정직과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재판은 법정에서 죄의 여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과 정의는 재판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죄를 고백해야 하고, 재판장은 정의롭게 판결해야 합니다.

시편 82편은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재판들이 정직과 정의를 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2절)”. 당시 재판은 가난한 사람과 부모처럼 도와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 불의한 판결을 받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없고 인맥이 없으면 공정한 재판조차 받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왕이요,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판결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권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1절)”.

그 주권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재판자들에게 진노를 나타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먼저 정직과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가 되어 예수님은 이 마음을 다시 선포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기 전이었지만, 그 말씀 이 시대 교회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누가복음 11장 42절)”.

당시 유대인들은 공의회를 통해 나라와 교회를 모두 운영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시행한 십일조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일조 자체를 금지하거나 폐지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모여진 헌금을 왜 정직하고 정의롭게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여진 헌금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지금 시편 82편의 내용처럼 재판에서 불의한 판결을 내리듯이, 모여진 헌금을 불의한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교훈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먼저는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들이 먼저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정치와 재판과 헌금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이 3가지를 정직하고 정의롭게 운영해야 합니다.

앞서 시편에서 교훈한 대로, 교회 안에도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직분이 없는 사람들, 새신자들, 노인들, 육아중인 사람들, 청년과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장년을 위해 청년이 희생하고, 청년을 위해 어린이들이 희생하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교회의 어른들이 공경받는 일도 등한시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재정도 정직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정 공개와 감사, 보고의 과정이 모두 정직해야 합니다. 최근 어떤 교회는 재정 감사를 외부 회계사에게 의뢰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회는 재정을 분기마다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교회는 바른 재정 사용을 위해 전문가를 초청하여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재정이 사용되는 목적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구제하며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 안에 약자들이 있는지 살피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직하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먼저 이런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튜브와 SNS를 통해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모두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좋은 일들이 나눠지기보다는 정직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동성애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와 세상이 충돌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교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 비난에 동참한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새로운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지만, 가나안 성도가 되어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제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가 정의를 외칩니다. 서로를 향해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정의입니다.

말씀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과 문화적 판단, 유행과 추세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교회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성경을 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의 운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이 시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이 나라에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8절)”.

오늘 우리의 교회들도 이 시인의 기도처럼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하며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